“우리는 왜 강대국 역사만을 배우는가?”

“서구는 언제부터 역사의 주역이 되었으며, 중국은 왜 서쪽으로 가지 않았나?”

“권력이 늘 역사를 필요로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의 ‘질문하는 역사’는 2002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주교수는 20년만에 다시 책을 내면서 역사에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재차 강조합니다.

학문은 결국 묻고 또 묻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경우 누구나 만족하는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질문의 과정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즉 묻고 잠정적인 답을 찾고 다시 그 다음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사고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주교수가 20년에 던졌던 질문은 현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임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서쪽으로 가지 않았을까’는 질문은 ‘시진핑은 왜 일대 일로를 밀어붙일까’와 연결됩니다.

10줄 요약_중국이 서쪽으로 가지 않은 까닭은 편

1.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후보중의 하나는 ‘유럽의 세계 팽창’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유럽 세력이 15~16세기 이후 그 아류인 미국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온 지구를 지배하게 됐을까?

2.중세만 해도 서구는 압박받는 불쌍한 소수 민족에 가까웠다. 이슬람의 세력팽창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긴 유럽이 처음 가까운 바깥으로 힘을 써본 것이 12~13세기 십자군 운동이었다. 약간의 자신감을 갖고 먼 곳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이후의 아프리카 해안 탐사나 아시아 여행이라 할 것이다.

3.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동부의 말린디를 거쳐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다 가마는 “우리는 기독교도와 향료를 찾아서 왔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사람은 모두 힌두교도였고, 향료와 교환하려고 유럽에서 가지고 간 직물은 비웃음을 샀다.

4.다 가마 일행은 인도사람으로부터 50년전에 당신들과 비슷하게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왔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명나라 환관 정화가 이끈 대 함대의 항해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1405년~1433년 사이 300척의 배와 2만8천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대를 바다로 내보냈다.

5.정화 함대가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순항한 것은 분명하고 일설에 희망봉 근처까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내친 김에 아프리카를 돌아 유럽까지 항해하여 런던 앞바다를 가로막고 행패를 부리고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정화의 항해는 평화적이었다. 대표적인 충돌사건으로 실론섬의 어느 국왕이 시비를 걸어와서 소규모 전쟁정도를 벌인 것일 정도로 평화적이었다.

6.중국은 종교에 대해 관대했다. 정화가 실론섬에 세운 비석은 세 개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화가 절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다는 내용은 한자로, 명 황제가 힌두의 신을 찬양한다는 내용은 타밀어로, 알라의 영광을 기린다는 내용은 페르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7.정화 함대를 파견한 이유는 생사를 알 수 없는 건문제(정난의 변에서 영락제에게 제위를 빼앗김)를 찾는 것이었으나, 실제 중국의 힘과 위엄을 과시하여 중화 세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인도양 순항이후 중국이 내린 결론은 해외의 오랑캐들은 중화에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이런 태도에 만주족의 위협이 심각해지자 남해보다는 북방대륙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8.또 유교적 관료들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정화 등 환관을 비판하자 해외 탐험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배는 쪼개서 땔감으로 쓰고 민간인이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를 법령으로 금지시켜버렸다.(해금령)

9.해금령으로 인해 중국은 ‘제국주의 없는 제국’ 자기 내부로 갇혀버린 제국이 되었다. 머지 않아 왜구들이 중국 해안을 제집 드나들 듯 헤집고 다녀도 제어하지 못하고,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서양 오랑캐들이 집적대도 마땅히 대응할 방도가 없게 된 것이다.

10.근대 초입, 중화제국은 여전히 세계 최정상에 있었다. 상업을 천시하는 중화제국의 황제의 눈에 포르투갈 왕이 아시아에 보낸 선단을 보내고 나서 ‘상업과 항해의 왕’이라는 촌스럽기 그지 없는 이름을 쓰는 것을 알았다면 눈물나게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거리 경주에서 최후의 승자는 뒤에서 뛰쳐나오기 십상이다. 포르투갈 뒤편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같이 훨씬 더 지독한 종자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황제가 알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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