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한국인에게 죽기전에 읽어야 할 고전 목록중의 하나입니다. 대부분 청소년 시절 교과서를 통해 열하일기 일부분을 접합니다.

또 조선사를 배울 때 영정조시절 실용주의 학문 조류와 관련해 열하일기를 또 접합니다.

책 이름이 친숙합니다. 또 당시 조선 사회가 바깥세상 신 문물에 눈을 뜨는 혁신성을 상징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은 열하일기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하일기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제 두꺼운 책을 들면 끝까지 재미있게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범진 서울대 교수가 새 책(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은 열하일기를 읽는 자신만의 독해법을 제시합니다. 구교수는 크게 조선과 청나라간 관계가 1780년을 계기로 전환점을 돌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열하에서 가져온 불상 파동을 듭니다.

구범진교수는 중국의 청시대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역사학자입니다. 그는 한국 사료를 넘어서 청나라 사료를 바탕으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를 썼습니다.

10줄 요약

1.열하일기』는 또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학 분야의 학자들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도 『열하일기』에 주목한다. 중국사 연구자들에게 ‘1780년의 열하’는 당시 청의 황제였던 건륭제(乾隆帝)가 자신의 ‘칠순 잔치’를 벌인 때와 장소다.

열하는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지역으려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을 보낸 궁전 ‘피서산장’이다. 현재 허베이의 청더 지역이다.

2.조선은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 여진인들을 변방의 보잘것 없는 오랑캐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으로 패전함으로써 그들이 세운 청나라의 신하로 전락하였다. 그에 따라 병자호란 이전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며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3.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진하(進賀) 특사를 파견한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150여 년 만에 일어난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청에 조공하는 여러 외국 가운데 1780년 열하의 칠순 잔치에 축하 사절을 보낸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4.청은 조선의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륭이 칠순 잔치가 열리고 있는 열하로 그들을 직접 초대했다. 박명원 일행은 열하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 조정이 사은사를 따로 파견해야만 한다고 판단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이었다.

5.박명원 일행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하에서 받아 온 ‘금불(金佛)’ 때문에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금불상은 열하에 머물던 티벳의 승려가 조선왕을 위해 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주자학 원리주의자가 주류였던 조선 지식계는 이를 두고 이단 문명의 유입이라고 박명원 일행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5.팔촌 형의 배려로 진하특사단에 합류했던 박지원의 입장에서도 사신 일행에 대한 봉불 혐의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마냥 나 몰라라 하고 침묵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필경 당시 사행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므로 봉불지사라는 오명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6.구범진 교수는『열하일기』에는 조선의 사신이 불상을 선물로 받는 장면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을 주목하고,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다기 보가 박명원의 전언에 기초한 것이라고 추론한다.

7. 박지원은 곤경에 처한 사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자가 이해하도록 이야기 소재를 취사 선택하고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순서를 의도적으로 배치·구성했다는 것이 구 교수의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열하일기』가 불상을 받들고 온 ‘사신을 위한 변호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8.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박명원이 불상을 받아 조선으로 가져온 것은 청 조정의 예상치 못한 환대와 후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전개한다.

9.불상 파동 외에 다른 관점에서 1780년 열하는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 변곡점이었다. 780년대 초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일어난 변화는 정조와 건륭이 성의와 은혜를 주고받는 우호 행위를 상승적으로 반복한 결과로 나타난 양국 관계의 증진 또는 격상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0.1780년 이후 청에 다녀온 조선 사신 일행의 경험과 견문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그 변화가 다시 사행 참가자와 조선 조정의 청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끼쳤음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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