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오일쇼크가 시작된다. 혼란한 중동전쟁 중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의 무기화’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단지 판매가격을 올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원유 생산량도 감산했다. 이에 석유관련 제품의 가격은 올라가고, 제품생산은 축소되는 공급쇼크가 온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시작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난감함은 정책의 딜레마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조이면, 경기침체가 온다. 반대로 경기회복을 위해 중앙은행이 돈줄을 풀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한편 브레튼우즈 국제통화체제도 1973년에 종료한다. 1944년에 44개국이 합의한 브레튼우즈체제는 필요에 따라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채택한다. 미국과 영국은 금과 자국통화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다른 나라는 미국의 달러 또는 영국의 파운드화를 기준으로 환율을 정한다. 곧 간접적 형태의 금태환제도가 도입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료로 이제 각나라의 통화가 금이나 달러에 고정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곧 각나라의 화폐에가격이 매겨져, 거래하는 시장이 만들어진다. 이제 시장의 판단에 따라 가격은 변동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시장상황에서도 197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공공지출을 확대한다.  팽창적인 재정·금융 정책의 시행으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쌓여간다. 연이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다시 인플레이션으로 파운드화의 평가절하가 시작된다. 이에 영국 정부는 무모하게도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 허나 영국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나 실패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명목상으로라도 기축통화의 지위에 있었던 영국은 이제 출렁이는 외환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1976년 노동당출신의 총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IMF는 스탠바이 차관의 댓가로 공공지출의 대폭적인 삭감을 요구한다. 금리인상과 함께 신용대출을 억제하는 등 통화량을 엄격히 관리한다. 이러한 조처는 새삼스러운 정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껄그러운 정책을 대신 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었고,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 시작된다. 1978년 포드 자동차의 파업을 시작으로, 1979년 봄 150만명 참가하는 최대의 총파업이 발생한다. 1979년 총선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건 대처의 보수당이 압승하여 정권을 차지한다.

만약 스스로 IMF 같은 정책을 채택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