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 공신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이 21세기 브로드웨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2015년 뮤지컬 ‘해밀턴’은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그렇게 혁명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로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19세기에 미국이 경제적으로 성취된 모든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준의장을 네 번 연임한 앨런 그린스펀은 해밀턴을 ‘타고난 천재’라 평한다. 해밀턴은 신생 국가 미국이 농업이 아니라 상(공)업공화국이 되길 바랬다.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제조업, 무역, 도시가 발전한 나라 미국이다. ‘공동체에 다양한 산업이 형성되면 각각의 개인은 적절한 능력을 찾아 적성에 맞게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밀턴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삶 자체가 그 누구보다 미국적이다. 건국 공신 중 해밀턴은 유일한 이민자였고, 바닥부터 올라간 사람이다. 해밀턴은 서인도 작은 섬에서 태어나, 사생아이자 고아로 자랐다. 그는 10대에 점원으로 취직하여 회계, 재고관리, 어음발행 등 상거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익혔다. 17살에 신문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에 뉴욕에 있는 현재의 콜롬비아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전쟁에서의 영광’을 꿈꾸던 스무 살 젊은이는 독립전쟁에 참여해 조지 워싱턴 장군의 최측근 참모로 일한다.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1789) 초대 재무장관으로 해밀턴을 임명한다.

재무장관 해밀턴이 마주한 현실은 파산 위기에 빠진 조국이었다. 미국의 신용은 ‘총 맞은’ 상태였다. 독립전쟁으로 발생한, 이자에 이자가 붙은 7600만 달러의 부채를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갚아야 했다. 그는 ‘부채를 자유를 위한 대가’로 보고 ‘공적신용’ 곧 민간 투자자들이 매매할 수 있는 정부채권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우선 주정부의 전쟁 부채를 연방정부가 떠안는 결정을 한다. 13개 주들의 부채는 전쟁수행과 독립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발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면 전쟁에서의 역할과 비용을 두고 13개 주는 끊임없이 논쟁했을 것이다.

큰 틀에서 상환방식은 ‘액면가대로, 새로 빌려서 갚는다’였다. 외국 채권자와는 신규 채무협상을 진행했고. 모든 종류의 국내 채권은 만기 없는 연방 채권을 새로 발행해서 갚았다. 그리고 기존 채권이자 6%를 4% 평균 이자로 낮췄다.

새 정부가 간절히 필요했던 것은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 연방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오직 주정부만이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후 14년 만에 드디어 수입 물품에 매겨지는 관세가 개별 주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에 귀속된다. 1913년 연방소득세가 법제되기까지 수입관세는 연방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면한 긴급문제를 해결한 해밀턴은 거의 백지상태에서 미국의 미래를 구상한다. 13개 연방들을 확고한 단일연방을 구성하고 하나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오늘날 거시경제학적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과 제도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연방 차원의 조세부과, 채권발행, 통화체제 등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차례로 만들어진다.

해밀턴이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1789년 미국 내에서 최소한 50개가 넘는 온갖 종류의 통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스페인 달러와, 영국 파운드화 등 외국화폐뿐만 아니라 각주마다 다양한 화폐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각각의 화폐가 실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화폐 위조 행위도 빈번했다. 해밀턴은 미국 주화를 규제하는 법령과 함께 외국 화폐를 제거할 목적으로 조폐국을 만든다. 1센트 같은 작은 단위의 동전을 만들어 소액으로 물건을 살 수 있게 했다. 마침내 난마와 같던 미국 내 화폐단위가 정리되고, 물물 거래의 농업사회에서 해방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산업발전을 위해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을 때, 미국에는 산업화에 자금을 댈만한 규모의 금융시장이 없었다. 해밀턴은 영국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았고, 미국에서도 똑같이 진행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공공의 신뢰와 권위를 민간과 결합하는 영란은행(영국중앙은행)의 모델을 참고했다. 그가 생각한 중앙은행은 연방정부의 세금을 관리하는 금고지기, 국채를 발행해 연방정부와 주법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역할,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를 조절하는 기능 등이다.

1791년 각주에 지점을 설립할 수 있는 미합중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20년의 면허로 설립된다. 그의 희망대로 자본금이 1000만 달러로, 200만 달러는 정부가 출자했다. 나머지 8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은 신청자가 넘쳐 단 한 시간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이 현상은 미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투기 현상이다. 이후 새로 발행된 연방 채권 소유자들 사이의 거래로 미국 최초의 증권시장(나중에 뉴욕 증권거래소)이 만들어진다.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금융시장이 필요하다. 금융시장을 만들려면 부산물인 투기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해밀턴은 자기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천재성과 설득력 그리고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동원했다. 원대한 설계의 큰 틀을 깨지 않는다면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었다. 그는 ‘수도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제퍼슨의 협조를 얻어 재정난 해결을 위한 법률을 통과시킨다. 해밀턴이 1789년 1회기에 새 연방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했다면, 단일한 나라 미합중국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승리는 빛났고, 그의 고통은 운명이 된다.

해밀턴은 1795년 1월 초대 재무장관직을 그만둔다. 9년 후 그는 정적이었던 부통령 애런버와 대립하다 결투 끝에 숨졌다. 결투 전 해밀턴은 ‘나는 내 첫번째 총알을 쏘지 않기로 했다’고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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