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표트르 대제가 1725년 서거한다. 그가 없는 러시아는 혼돈에 빠져들었고, 왕위는 불안했다. 그렇게 흔들리던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이 독일에서 넘어온 ‘이방인’ 예카테리나 2세다.

프로이센에서 소피아로 불리던 그녀(1729~1796)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로 지목된다. 러시아 황실의 먼친척이었던 어머니의 인연 때문이다. 1744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로 떠난다. 황후로 신분이 바뀐 소피아는 러시아정교 세례명 ‘예카테리나’를 썼다. 1761년 12월 황제로 즉위한 표트르 3세는 허약하고 무능했다. 1762년 여름,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한다.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한다.

17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 동안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의 외교와 내치를 이끌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변방으로 멈추어 있었다. 이에 예카테리나는 모든 정치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혁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국가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다.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가로 이전시켰다. 이로 인해 국고는 풍족해졌고 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를 지배하던 교회가 세력을 급격히 상실하여, 예카테니라의 권력이 자연스럽게 강화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통치 기간 동안 무려 12개 이상의 봉기를 겪었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1773년에 푸가초프의 반란이다. 전직 육군 장교인 푸가초프는 그녀의 통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러시아 군대의 위력에 직면한 푸가초프의 지지자들은 결국 그를 버렸고, 그는 1775년 1월에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 재위시대인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사상과 공화주의에 대한 희구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계몽주의에 심취해,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류했다. 그녀는  ‘계몽군주’를 꿈꾸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767년 농노와 성직자를 제외한 각계각층 56대표로 구성된 회의체를 도입하나, 2년 후 해산된다. 그녀는 자유농민 제도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농노제를 확대하는 정치적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번영의 군주로 예카테리나는 성공적이었다.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러시아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러시아 곳곳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29개 주의 지방제도 정비된다. 군의 현대화가 진행되고, 국가의 행정 및 법률제도는 안착된다. 러시아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개혁과 건설’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때로는 러시아의 광대한 관료주의에 발목을 잡히기도 했지만…

오스만트루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크림반도를 차지하고 흑해 항로를 확보한다. 어느덧 러시아 영토는 남쪽과 서쪽까지 확장된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의 국경은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어 크리미아와 폴란드 대부분을 지배한다.

이제 러시아는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제국 러시아의 초석을 놓았다면, 예카테리나 대제는 제국으로서의 러시아를 완성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인을 독일인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독일인 예카테리나 대제는 러시아인을 ‘위대한’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는 68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그녀의 적들은 추악한 결말을 바랬지만, 예카테리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자긍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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