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를 패망으로 이끈 주역은 라스푸틴이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그를 등용한 계기는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때문이었다. 황태자는 몇 차례 죽음의 위기까지 맡게 되지만, 당시 최고의 유럽 의사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오직 라스푸틴만이 병세를 완화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어떤 방법을 통해 황태자를 치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심리적 조정을 통해 증상을 완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형벌같은 혈우병 덕분에 거구의 기인 라스푸틴은 권력까지 잡았다. 시베리아 출신의 자칭 수도승 라스푸틴은 젊은 시절 중동과 지중해 지역 순례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신경쇠약증 환자였던 황후의 총애로 라스푸틴은 각료 인사를 비롯한 권력의 전반을 좌지우지했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노동자의 봉기를 총칼과 대포로 짓밟은 배후가 그였다고도 한다. 라스푸틴은 권력에서 소외된 귀족들에 의해 살해됐다. 그 이후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공화국을 건설했다. 18년 7월에 황제와 황후,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그들의 4녀 1남은 총살당했다.

결국 러시아 황태자의 혈우병이 왕조의 몰락을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유럽 왕족의 병으로도 불리는 혈우병은 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에서 비롯되었다. 유전병인 혈우병을 이해하기 위해 유전자 변이의 메카니즘을 알아보도록 하자.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별은 X와 Y 염색체에 의해 결정된다. 정상적인 여성은 X 염색체 2개를, 남성은 X 염색체 1개와 Y 염색체 1개를 가지고 있다. X 염색체는 다양한 유전자정보를 가지고 있는 반면, Y염색체는 남성의 성별을 결정하는 기능이 거의 유일하다. 따라서 유전병 인자가 있을 경우,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

여자는 또 다른 X 염색체에 있는 정상 유전자가 보완해 주기 때문에, 유전병 인자을 보유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X 염색체만 가진 남성은 유전병인자가 있을 경우, 그 특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X 염색체에 생기는 변이로 인한 유전병은 보인자인 어머니의 아들에게서, 또는 딸을 통해 손자에게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X 염색체와 연관된 질병이 바로 혈우병(haemophilia)이다. 19세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로 유명하다. 남편 알버트 공과 사이가 각별했던 빅토리아 여왕이 둘 사이에 나은 자식이 9명이나 되었다. 아들 넷 중 하나인 레오폴드가 환자였고, 딸 다섯 중 최소한 두 명이 보인자로 판명되었다. 현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셋째 아들 에드워드 7세의 후손이다. 그는 건강했으므로, 영국 왕실에는 혈우병 변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여러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고 혈우병 유전자는 유럽 왕가로 퍼져나갔다. 혈우병은 이러한 이유로 왕족의 병으로 불리게 된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는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보인자를 물려받았고, 네명의 딸을 낳고 마침내 얻은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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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혈우병 보인자와 환자(출처: 위키피디아)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에 말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정상적인 염색체를 알렉산드라 황후가 물려받아다면, 그래서 황태자의 혈우병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과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상상해보는 것은 꽤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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